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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날입니다. 하지만 죽은 아버지를 들쳐업고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던 동풍신 그리고 남편인 도산 안창호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이혜련 여사 많은 사람이 모르는 무명의 여성독립운동가 분들이 많아서 이런 글을 쓰게되었습니다. 지금도 이름을 모르는 많은 분들이 계시지만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간직해야 겠습니다.




1. 남자현


두 번이나 단지한 것으로 유명해 여자 안중근으로 불린다.

그녀의 남편 김정주는 1895년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고

평범한 전업주부로 살지만 1919년 3.1 운동 참여로 바뀐다.

그녀는 아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면서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가 옥바라지를 통해 대모로 불린다.




2. 김마리아


1914년 일본 유학을 가서 도쿄여자학원 졸업을 앞둔 그녀

하지만 도쿄 유학생이 중심이 된 2.8 독립 선언에 참가하고

3.1 운동 관여를 했다가 체포되 고문 휴유증으로 고생한다.

그녀는 시카고 대학교 석사학위를 받고 교육에 힘써왔지만

일본의 간섭으로 고생하다 고문 휴유증으로 인해 사망했다.

러시아 출신의 동명이인 쌍권총의 전설 김마리아도 있다.




3. 박차정


유관순 열사 이후 두 번째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 위인

고등학교에 재학하던 시절부터 독립운동에 참여를 해오며

사회운동 단체에서 활동을 하다가 1930년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1935년 여성 독립운동가를 양성하는데 힘써오지만

일본군에 의한 총상과 관절염 때문에 고생하다 병사했다.




4. 안경신


3·1독립 운동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1개월 구류를 살았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더욱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그해 대한애국부인회에 가입하고 임시정부 활동을 하면서

평안남도 경찰국 청사에 폭탄을 던져 일본 경찰과 맞선다.

1921년 사형선고 이후 7 년을 옥에서 살다가 석방 되었다.




5. 정정화


고관대작의 딸로 고위 관료 김가진의 아들과 결혼했으며

남편은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을 하고

정정화 역시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뜻을 함께한다.

그녀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국내를 5차례 오가는데

10여년간 자금을 모으면서 연락책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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